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우서 사건 (문단 편집) == 우서 사건 ==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131935339_287b33184d.jpg]] 봉기의 중심 인물이었던 모나 루다오(가운데)의 모습 1930년 10월 9일 대만 북부의 원주민 중 하나인 세디크족(賽德克族 / Seediq)[* 2008년까지는 아타얄족(泰雅族 / Atayal)의 일부로 분류되었다.]의 현족장이자 전족장이었던 루도 루헤(魯道·鹿黑 / Rudo Luhe)의 아들 [[모나 루다오]](莫那魯道)는 자신의 장남인 타도 모나의 결혼식을 열고 있었는데 마침 순찰을 돌고있었던 일본 경관 요시무라 카츠미(吉村勝美)에게 신랑이자 모나 루다오의 장남 타도 모나가 포도주를 따른 잔을 받길 권유했으나 요시무라는 야만인이 금수의 피로 더럽혀진 손으로 따르는 잔을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런데도 타도 모나가 계속 잔을 받길 권하자 참다못한 요시무라는 곤봉으로 그를 때렸고, 이내 싸움이 일어나 요시무라는 부상당했다. 그 다음 날 모나 루다오는 사과하기 위해 그에게 포도주를 바치려 하였으나 이것 또한 거절당했다. 10월 27일 우서 초등학교에는 육상 경기로 일본인들이 모여 있었는데, 모나 루다오가 보복을 위해 300여명의 전사들을 이끌고 이곳을 습격해서 134명의 일본인과 2명의 대만인을 살해했다. 이에 일본 측은 2,000명의 병력을 우서로 보내고 심지어 독가스가 주입된 산탄을 살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본 측에 붙은 일부 세디크 족에게 반란을 일으킨 나머지 세디크족에 대한 머리사냥을 허용하기도 하였다. 세디크 족도 11월 4일부터 1,200명의 전사를 조직해서 저항했으나 진압 끝에 세디크 족 중 644명이 죽었다. 3개월간의 봉기 끝에 1930년 12월 17일에 봉기는 진압되고 남은 세디크 족 500여명도 항복했으나 4월 25일 일본 측에 붙은 원주민 측에 의해 세디크 족 생존자가 습격당해 216명이 살해 당하기도 하였다. 1931년 5월 6일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타지로 강제이주를 당했고 "반란 협력자"의 적발도 계속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